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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로라
    Essay/Essay 2017. 4. 7. 15:38



    현수는 똑똑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헤밍웨이의 책을 숙독했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로마인 이야기' 전집을 독파했다. 이런 아이가 있을 수가. 그의 부모는 이렇게 생각했단다.

    현수의 아버지는 선비였다. 가난했으나 학식이 뛰어났다. 현수의 할머니는 아버지가 뛰어난 학식을 이용해 계층상승을 이루길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시골교회의 목사를 택했다. 가난은 이어졌다. 시골 목사에게 사치였으나 아버지는 서재를 원했다. 제대로 된 살림 밑천은 없어도, 네 식구가 한 칸짜리 방에서 살 붙이며 살아도 책 욕심은 내려놓지 못한 아버지였다. '책 살 돈으로 냄비나 사지'라거나 '이 책들 좀 치워!'라는 엄마의 성화에 아버지는 서재가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입 한번 벙긋 하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는 동네 폐가를 직접 개조하기 시작했다. 곧 변변한 서재를 흉내 낸 곳이 만들어졌고 한쪽 벽이 책으로 가득 찼다.

    현수의 아버지는 늘 현수를 데리고 서재로 향했다. 그곳은 곧 현수의 아지트가 됐다. 또래 아이들이 산이고 들이고 쫓아가 오디와 산딸기를 딸 때 현수는 아지트를 찾았다. 현수의 여동생이 추장이라도 된 것 마냥 제 친구들을 이끌고 바다로 수렵을 떠날 때도 현수는 아지트에 있었다. '밖에 좀 나갔으면 좋으련만.' 현수의 어머니는 불안해했다. 그러나 현수가 이내 책으로 쌓은 내공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내내 전교 1등을 하자 현수의 어머니는 불안을 떨쳤다. 현수의 아버지도 내심 좋았다. 그가 이루지 못한 학자의 꿈을 현수가 이루길 바랐다. 동네 사람들도 웅성댔다. 우리 마을에서 인물이 나오려나보다. 중학교에 진학한 현수가 전교 1등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자, 현수의 부모는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는 시켜야겠다.'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수의 부모는 현수에게 엄청난 기대를 걸었다. 현수의 아버지에게는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뤄줄 존재였고, 어머니에게는 집안을 일으킬 존재였다. 안 그래도 없는 재산 탕진하는 날이 오더라도 현수의 공부만큼은 꼭 시키겠다는 것이 부모의 결심이었다. 현수가 17살이 되던 해, 현수의 부모는 그를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기숙사비에 두 집 살림 생활비에,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조차 못했지만 부모는 일단 저질렀다. 현수는 유학을 떠났다. 가업 세우기라는 특명을 부여받고 섬에서 벗어나 큰 도시의 학교로 진학했다.

    현수의 부모는 당부했다. 공부에만 신경 쓰랬다. 물려줄 재산도 집도 없으니 공부만이 살길이랬다. 그래서 공부만 했다. 번번이 기숙사비가 밀렸지만 외면했다. 선생님께 불려가 한소리 들을 때도 이만 악물었다. 그러자 도시 애들 뒤만 따르던 등수가 서서히 올랐다. 2학년이 되자 현수의 성적은 상위권으로 올랐고 3학년에 진학하자 드디어 전교 1등 타이틀을 달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S대를 언급했다. "현수 정도면 승산 있습니다 어머니." 선생님이 어머니께 말했다. 희미하게 올라가는 어머니의 입꼬리가 보였다. 부모의 기대가 현수에게 어느새 부담이었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자신만 바라보며 무리해서 도시에 진학시킨 부모님께 궂은소리 한마디 할 수 없었다. 현수는 그저 열심히 했다. 현수 딴엔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러나 수능시험을 본 그 해, 현수는 S대에서 미끄러졌다.



    그때, 현수는 외삼촌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현수가 태어나고 외할머니의 장례를 치를 때 외에는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현수의 어머니는 외갓집과 교류하지 않았다. 절실한 불교 신자였던 외갓집 식구들에게 홀로 예수를 믿는 것도 모자라 목사에게 시집 간 그녀는 배신자였다. 그녀는 괘씸죄 명목으로 집안에서 퇴출당했다. 힘겹게 사는 그녀에게 부유한 친정 식구들은 단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삼촌이 현수가 공부를 좀 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취해온 것이다. 그는 현수에게 재수를 제안했다. 재수는 생각지도 않았던 현수였다. S대만큼은 아니지만 서울의 중위권 대학에 입학하려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현수의 부모는 혹했다. 아들을 S대에 보내고 싶었다. 갑작스런 남동생의 연락을 현수의 어머니는 한때 의심했으나 '이제껏 내밀지 않았던 도움을 손길을 이제야 내미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현수의 외삼촌은 현수에게 서울의 재수학원에 가라고 했다. 학원비와 생활비 등의 비용을 지원해줄 것을 약속했다. 현수는 재수를 위해 서울로 떠났다.

    재수학원에서 공부에만 집중한지 6개월이 되던 때였다. 돈이 들어오는 날짜가 점점 늦춰지더니 급기야 외삼촌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현수의 부모는 기다리라고 했다. 현수는 버텼다. 그때부터 학원비 120만원과 40만원의 월세, 그리고 생활비는 현수 부모님의 몫이었다. S대만 들어가면 지금까지의 고생을 보상받을 것이라 여긴 현수의 부모는 순간의 역경을 넘으려 애썼다. 현수 역시 부모의 피나는 노력에 부응하려 애썼다. 대치동 빌딩숲 사이로 떠오르는 해와 함께 하루를 맞이했고 이미 숨어버린 땅거미 속에서 잠에 드는 생활을 몇 개월 반복했다.



    그때까지 외삼촌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학원비는 밀렸고 월세가 쌓였다. 현수의 부모에겐 밀린 학원비와 월세를 부담하는 것도 벅찼다.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수능 세달 전, 제일 중요하다는 시기에 현수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현수도 지쳤다. 끝이 보일 때 무너졌다. 언어 1등급, 외국어 3등급에 수리 4등급. S대는커녕 작년에 합격했던 서울 중위권의 대학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는 점수였다. 어머니는 학교 교무실에 엎드려 하염없이 우셨다. 현수는 어머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저 우두커니 서있었다. 선생님 역시 그랬다. 아무도 어머니를 일으키지 않았다.

    4년이 지났다. 자그마치 6수를 했다. 어느새 S대 진학의 꿈은 현수의 꿈이 됐다. 부모는 말렸으나 현수가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코 S대에 진학해 계층상승을 이루고 외가에 당당히 서겠다는 생각에 현수는 잠식당했다. 현수는 그 어떤 학원도 다니지 못한 채 공부를 이어갔다. 홀로 삼수, 그리고 6수까지 이어온 그는 엄청난 사교육을 받는 아이들을 이길 수 없었다. 잡힐 거라 여겼던 S대는 잡히지 않았다. 현수는 결국 지방의 국립대에 들어갔다.

    현수의 부모는 말했다. 요즘엔 학벌이 좋아도 소용이 없다더라. 취업을 위해선 또 학원에 가야한다더라. 취업을 하더라도 곧 잘린다더라. 정규직이 줄어든다더라. 사교육 시장 진입에 실패하고 상위권 대학 진학에 실패한 뒤 현수와 현수의 부모는 현실을 목도했다. 계층상승의 꿈을 접었다. 현수의 부모는 현수에게 그저 물 흐르듯 살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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