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지난 7월, 그때의 프라하 - 7일차] 비관과 낙관 사이, 나의 7일차와 카프카의 삶
    Travel/the Czech Republic 2018. 1. 9. 22:56

    01/ 세상엔 두가지 전망이 있다. 비관과 낙관. 이 둘은 한끝 차이다. 


    나는 물건에 관해서 부정적인 감정 쪽으로는 무디다. 흰 옷에 빨간 양념이 튀거나 비싼 핸드폰을 시멘트 바닥에 떨어뜨려도 '악!' 한마디와 함께 그 사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끝이 난다. 낙관적이라 살기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프라하 7일차 새벽 3시경, 내 핸드폰이 블타바 강물의 강력한 침입에 즉사하고 말았다는 걸 깨닫자 짜증이 밀려왔다. 처음으로 물건이 상하거나 잃어버렸을 때 분노에 휩싸였다. 마침내 프라하 여행에 대한 좋았던 기억이 나쁜 쪽으로 흘러갈 거라 비관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베를린행을 취소해야 했다. 혼자서 베를린에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핸드폰에 의지할 수 없었다. 핸드폰에 모셔둔 기차표가 없으니 종이표라도 마련해야 했는데 두번째 집에는 프린터가 없었다. 설상가상 친구와의 약속장소까지 갈 길이 망망대해처럼 느껴지는데다 혹시나 핸드폰 없이 돌아다니다 유럽 한복판에서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독일행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에게 몇달 전부터 베를린행을 예고하며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공교롭게도 베를린행 전날 핸드폰이 먹통이 돼버려 그것도 당일 새벽, 가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게 조금, 많이 민망했다.  


    베를린, 너랑 또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두번째 이유, 프라하에 오고난 뒤 애장품 1위로 등극한 사진! 프라하는 워낙 예뻐서 나의 족발같은 사진 찍기 기술에도 불구하고 찍는 족족 미관이 핸드폰 속으로 저장됐다. 하지만 이 사진이 다 날라갔을까 불안에 떨며 맥북으로 다가갔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맥북에게 제발 살아나라며 간절한 감정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는 나도 참. 역시나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백업을 하지 않아 프라하로 오기 직전까지의 사진만 저장돼 있었다. 한 30분 간 iCould의 이것저것 모두 클릭해보다 이미 먹통인 핸드폰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사진 다시 가져오기'였던가, 이 체크박스 옵션을 해제했다 다시 켜니 갑자기 사진이 촤라락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낙관 모드로 돌아섰다. 핸드폰은 한국에 가서 사지 뭐, 베를린행은 이미 취소됐고 사진은 돌아왔으니 됐다 싶었다.



    새벽 4시쯤 다시 잠에 들었고 8시쯤 깼다. 원래라면 6시 30분, 베를린행 기차를 타야만 했을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새벽에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쏟은 뒤 잠들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유달리 피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서는 안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쓸데없는 욕망이 야기했고 어이 없는 과오로 마무리 된 핸드폰의 사망으로 베를린 행이 취소됐으니 지난 날보다 더 열심히 프라하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잠에서 깨자 바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6번째 밤은 마음이 허해 친구들 옆에서 잤다.)  



    02/ 아침 커피  

    커피 한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테라스의 티테이블에 앉으면 청량한 초록빛 정원을 마주할 수 있다. 


    이 아파트먼트에는 각 호수(數)마다 정원이 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섰을 때 호스트가 만약 원한다면 정원도 있으니 마음껏 즐기라 했는데 그때는 5층인데 무슨 정원이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짜였다. 이 아파트먼트의 뒷뜰에는 넓은 정원이 있고 몇평씩 구역이 나눠져 있다. 예상하기로는 아파트에 입주하면 모두가 정원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았고 정원의 크기가 다른 걸 보니 예상하기로는 아파트 평수에 따라 정원의 평수가 다른 듯 했다. 공산주의 방식에 따른 정원 제공과 자본주의 방식에 따른 평수 제공의 조화가 참 미묘했다. (어찌보면 많은 돈을 내고 정원이 딸린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을테니 철저히 자본주의에 따른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는 프라하에서도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겠지.' '오늘은 뭘할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보니 어느새 몇 모금 남은 커피가 식어 있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친구들은 6번째 밤도 강다니엘과 함께였다. 그녀들의 밤은 온전히 강다니엘 몫이었을테니 오전은 잠으로 채워야 했다. 그래서 나는 7번째 오전 시간을 혼자 즐기기로 했다. 카프카 박물관, 그리고 팔라디움에 들리기로 했다. 오전의 일정을 계획한 뒤 몇 번 트램을 타야 하는지, 어느 트램 역에서 내려야 하는지 세세한 루트를 다이어리에 적었다. 혹시나 발생할 지도 모르는 미아 신세를 방지하기 위해 맥북도 챙겼다. 혼자서 집을 나서기 직전에 깬 친구들에게 1시쯤 돌아올거라 인사를 전하고 첫번째 집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첫번째 집 근처엔 카프카 박물관이 있다. 내가 잠시잠깐 업무를 하던 시간에 친구들이 들렸던 그곳이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해외 여행을 같이 왔으니 동일한 장소에 들려 같은 감정이든 다른 감정이든 공유하는 게 좋겠다 싶어 카프카 박물관 행을 결정했다. 



    03/인생 백 년에 고락이 상반이라, 프란츠 카프카의 삶 

    짧았던 40여 년의 삶, 내가 느낀 프란츠 카프카는 '주체적인 개인으로서 실존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비운했던 작가'다. 프란츠 카프카가 본인을 둘러싼 환경을 초월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실존했다면, 실존을 추구하는 인간이 감내하는 고통을 작품을 통하여 사실적으로[각주:1] 나타낼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카프카의 작품을 완독한 적은 없는 반쪽자리 독자지만 독자가 가진 '서평할 수 있는 권리'를 감히 행사하자면,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난 독일인, 독일인이지만 유대인 등 민족적, 국가적으로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와 그의 예술적 감성을 이해하기엔 무지했던 어머니, 예술적 감성을 존중하기엔 세상의 기준에 물들었던 아버지, 법률가로서의 그, 소설가로서의 그를 원했던 여인들의 틀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나, 주체적인 나'를 추구했던 것 같다.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사후 칭송받고 있지만 조금 비틀어 보면 자기 자신을 함부로 평가하고, 자신의 삶을 흔드는 환경이 모두 싫었던, 중2병 환자였을 지도 모른다. 


    카프카 박물관에서는 카프카 문학의 기저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그의 삶을 연대별로 전시하는 곳이다. Malostranská 트램 역에서 내려 단 3분만 걸어가면 박물관의 입구로 들어갈 수 있다. 도착하자마자 약 200CZK를 내고서 표를 구매한 후 관람을 시작했다. (카프카 박물관은 사진 촬영을 격하게 금지하고 있어 박물관의 현장감을 살리는 사진이 없는 게 아쉽다. 텍스트로 열심히 설명하겠지만 부족할 수 있다.) 


    <출처 - YELP>



    관람을 마친 소감부터 이야기하면 '설치 미술'을 보러 온 줄 알았다. 전시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전시를 마무리하고 박물관을 나오는 순간까지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삶을 이해하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전시 기법을 보는 게 의외의 관람 포인트였다. 이 박물관을 개관했고, 지탱하는 이들이 제법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다. 


    그를 감싼 가족 환경은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버지의 편지, 어머니의 편지는 그들의 가치관을 단편적이지만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체코의 다수를 차지했던 독일인이면서 중산층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세속적이었고, 강압적이었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카프카의 예술적 감성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의 경우 '용납 못함'이라면, 그의 어머니는 '이해 못함'이었달까. 


    가족의 편지를 읽은 후 다음 코너로 넘어가면, 카프카가 살았던 체코의 당시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전동열차와 거리, 학교와 직장을 공유하지만 체코를 구성하는 독일인, 체코인의 교류는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단절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그의 연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카프카의 연인이었던 여성들의 얼굴이 큰 액자에 매달려 있다. 그 아래에는 그들과 나누었던 편지, 그 여성에 대한 설명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 사랑했던 연인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보고 있자니, 실존하지 못해 불행했던 카프카 인생의 전체가 고락이 아니었던 이유는 숱한 여성들과 사랑했기 때문이지 아닐까 싶다. 


    3년 전 들렸던 황금소로. 카프카가 2년 간 집필했던 곳이라 한다.


    나름 오랫동안 진지하게 박물관 관람을 끝내고 카프카와 관련된 굿즈들로 채워진 SHOP에 들러 소비욕을 마구 뿜어냈다. 카프카의 뒷모습이 그려진 종이꽂이(?), 에코백 등을 손에 들고서 며칠 전 팔라디움에 들려 눈과 마음에만 담았던 옷들을 결국 내 손에 넣기 위해 또 다시 팔라디움에 갔다. 


    1. 사실적인지는 나는 잘 모르고, 외부의 평가다 [본문으로]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