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지난 7월, 그때의 프라하 - 6일차] 체코 속 베트남인, 그리고 또 쇼핑
    Travel/the Czech Republic 2017. 12. 28. 19:05


    01/ Jeseniova 50, 130 00 Praha 3, Czechia

    두번째 집은 확실히 주택가다. 


    밖을 온전히 가리지 못하는 반투명의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은은히 들어왔다. 예배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도, 관광객 무리의 들뜬 얘깃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곳의 아침은 조용하다. 이사한 첫날 나는 거실 쇼파에서 잤다. 두번째 집의 거실엔 사면 중 두면이 테라스로 나갈 수 있는 통유리 창문이다. 그 사이로 긴 시간 햇빛의 습격을 받아 잠에서 깼다. 



    한국에서는 10년에 한 번 있을 일이지만 프라하에서는 매일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날도 일어나자마자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을 게 없었다. 두번째 집 근처에는 TESCO Express와 테스코에 버금가는 마트 브랜드 BiLLA가 있었는데 아직 장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내 배는 온통 꼬르륵 우르르쾅쾅 소리를 내며 음식을 넣어달라는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고 있었다. 나는 강다니엘을 보다 늦게 잠에 든 듯한 희은이를 깨워 용돈을 받았다. 다시 냉장고를 들춰본 뒤 두번째 우리집 1층에 있는 간단한 식료품점을 찾았다. 


    1층의 그 식료품점은 가로로 긴 모양의 작은 상점이었다. 들어서자 왼편에 냉장 코너가 있었고 오른편은 빵으로 채워져 있었다. 빵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으므로 바로 왼편을 훑었다. 사실 아침부터 장을 보러 나온 가장 큰 이유는 달걀이었다. 그날 아침따라 스크램블이 너무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햄, 소시지, 요거트 정도만 눈에 보였다. 설마를 마음 속으로 되뇌며 나는 계란을 사러 왔는데, 여기 계란이 어디에 있냐고 주인에게 물었다. 내 물음에 그 상점의 주인은 'English, No!'라고 답변하다 아마 답답했는지 지나가던 다른 분께 도움을 요청했다. 그 분은 친절히도 평범한 날 아침 갑작스레 닥친 관광객의 물음을 해소해주고자 통역사 역할을 맡아주셨다. 내 물음과 주인장의 대답을 번갈아 듣던 그분은 마침내 정말 안타깝게도 '오늘'만 계란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대신 조금만 내려간 뒤 우측으로 가면 베트남 마트가 있으니 그곳에 한번 가보라고 했다. 


    정말 1분 거리에 베트남 사람이 운영하는 마트가 있었다. 그곳에서 무사히 계란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니 돌아다니는 길목마다 자리한 베트남 마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체코와 베트남, 그들의 관계를 조사해봤다. 


    희은이가 스크램블 안해줬다.




    02/ 체코슬로바키아로 초청된 베트남인 

    체코가 공산주의 권역에 들어선 해는 1945년이다. 그 전까지 체코는 중부유럽에서 '산업의 허브'였다.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중간에 위치해 교역도 활발했다. 활발한 교역의 중심에는 체코의 기술이 있었다. 체코는 제조업 강국이다. 시계, 자동차 등 상업용 제품부터 시작해 기관총, 전투기까지 무기 제조까지 뛰어났다. 1930년대 2차대전 전에는 체코의 무기 생산량이 늘어나 전 세계로 수출할 수준이었다. 


    45년, 체코가 공산주의화 되면서 국유화의 진행으로 생산 속도가 더뎌지긴 했으나 제조에 강한 DNA는 그대로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1950년대부터 베트남 노동자를 초청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공화국이었던 베트남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떠난 베트남인들이 숙련된 기술자로 귀환할 것을 기대하고 적극적으로 체코행을 권장했다. (1960년대 독일로 파견된 대한민국의 간호사와 광부들이 떠오른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본래 각자의 국가명으로 돌아간 이후 국가 소유의 공장이 폐쇄됐다. 대부분 노동자로 생활하던 베트남인은 아마도 이때부터 거리 시장에서 자그마한 상점을 꾸린 듯 하다. 50년대부터 시작해 80년대까지 유입된 베트남인에 더해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로도 체코와 베트남인 지속적인 유대 관계를 이어왔다. 이민자들이 늘어났고, 베트남 마트도 늘어났다.  


    유통에 강해진 베트남인들은 그들의 세를 점점 확장한다. 프라하에는 베트남인들이 꾸린 도매시장 사파(SAPA)가 있다. BiLLA, TESCO, Albert에 비견할 정도로 큰데다 훨씬 더 저렴한 가격으로 식료품, 의류, 모피, 생활용품 등을 판매한다. 최근엔 도매 및 소매상에서 미용실, 스파 등 서비스업으로까지 진출하고 있다. 체코와 베트남은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며 서로의 정치 체제를 교환(?)했다. 베트남은 전쟁 끝에, 1976년 베트남 민주공화국에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1990년 체코는 혁명 끝에,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두 국가의 정치 체제가 변경되는 순간에도 타국에서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낸 베트남인의 정착기를 세세히 뜯어봐야겠다.  





    03/ 그들의 갈등 

    2011년 기준으로 베트남 이민자는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에 이어 체코에서 세번째로 많다. 본격적으로 이민의 역사가 시작된 지 50년 쯤 지났을 때 그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유럽국가가 그러한데 체코 역시 소수 민족이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견지할 수 있는 권리를 헌법에서 보장한다. 또한 체코는 2000년 소수 민족의 언어를 유지하는 것이 골자인 '유럽현장'에 서명하였고 유럽연합이 체코에 요구하는 소수 민족의 언어를 교육할 의무를 지닌다. 


    베트남인도 체코에서 소수민족으로 보호되고 있다. 하지만 2004년, 체코 소수민족 문제에 관한 체코 정부 자문기구인 전국 소수민족위원회는 '소수민족'이란 용어의 재정의를 시도한다. 소수민족이란 원래 이 땅에 거주했던 원주민으로. 따라서 베트남인은 체코의 소수민족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이후 어떤 갈등이 표출됐고 해결이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결국 2013년 베트남인들은 다시금 소수민족의 보호권 내에 들어간다. 


    체코 속 베트남에 대한 정보는 여기까지. 어찌됐건 나는 아침으로 무사히 달걀프라이를 먹은 후 다시 관광모드로 밖을 나섰다. 



    출처: News Kotra, Wikipedia, DnD Focus, Embassy of the Czech Republic in Hanoi








    04/ Polaroid Love

    첫번째 행선지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샵, Polaroid Love다. 오로지 폴라로이드 카메라에만 집중하는 가게, 체코에 생긴 첫번째 Polaroid Premium Reseller다. 처음 도착하면 샵과 같은 느낌은 없다. 회색 벽면에 흰색 문 하나가 달랑 있는데 예술가의 작업실일까봐 들어가기 무섭게 생겼다. 우리는 우선 노크를 했다. 몇 번 노크를 하니 'Come in'이라 말하는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렸고 조심히 문을 열었더니 카메라 샵이 펼쳐졌다. 





    때마침 직업 사진가로 보이는 분이 카메라를 구매하고 있었다. 직원이 온통 전문가 포스를 품기는 그분께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구경했다. 다양한 브랜드, 다양한 디자인, 다양한 크기의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많다. 하나쯤은 구매하고 싶은 욕구가 뿜뿜 일었는데 카메라는 역시나 비싸다. 사진에 그다지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실 사진에는 젬병이어서, 괜한 소비를 하지 않기로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이곳, 폴라로이드 러브는 관광객 혹은 현지인들에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대여해준다. 정확한 금액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하루 대여비가 비싸지 않다. 오히려 "오 싼데?"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전쟁 때 무기로 쓸만한 어마무시하게 거대하고 오래된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등장하고 그걸 들고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빌리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거기에서 에코백을 다양한 크기로 하나씩 구매했다. 


    Epilogue. 폴라로이드 러브에서 구매한 에코백은 보람피셜 한번 빨면 쪼그라든다고 한다. 안 빨길 잘했다. 




    05/ Play bag 

    여기 진짜 짱이다. 눈이 미친듯이 회전운동을 하다가 튀어나올 뻔 했다. 다 사고 싶었다. 다 다 다!! 


    플레이백은 전문가 8일이 직접 만든 가방을 생산 및 판매한다. 그들의 모토는 '수십년 동안 유지되는 가방'. 트렌드를 아우르는 디자인과 세월을 거스르는 퀄리티, 이게 그들의 목적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렇게 제품의 재질에 신경쓰지 않는다. 처음 봤을 때 '예쁘다' 싶으면 구매 욕구가 생긴다. 플레이백은 프라하에 들렸던 상점 중 내 구매 욕구를 200%까지 끌어 올린 곳이다. 앞서 쇼핑하느라 쓴 돈이 그리워졌다.  


    특히 저 위의 가죽가방. 우리 아버지가 들고 있으면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사고 싶었다. 하지만 가격이 거의 27만원. 나는 나의 소비 패턴을 잘 알고 있어서 취직 후에도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만들었는데 내가 왜 진작 만들지 않았는지 후회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심지어 E-SHOP에서도 자취를 감춰 다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스럽다. 대신 나는 클러치 백으로 쓸 수 있는 가죽 가방과, 지금은 안경집으로 쓰고 있는 TOOL BAG을 샀다. 아마 클러치백은 10만원, TOOL BAG은 6만원 정도로 기억한다. 





    플레이백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아침을 먹고 나왔지만 금방 배가 고파졌다. 우리는 실패했던 쌀국수, 간절한 쌀국수를 찾아 떠났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