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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7월, 그때의 프라하 - 7일차] 옛 흔적이 남은 공간, Cafe Kavarna와 Vysehrad
    Travel/the Czech Republic 2018. 5. 7. 20:53





    06Kavárna co hledá jméno

    첫번째 숙소에서 만난 프라하 핫플레이스 추천 책은 Kavárna를 이렇게 표현한다. 공장을 개조한 카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모자람 없는 수식어다. 


    서울에도 공장의 과거와 카페의 현재를 가진 공간이 더러 있다. 대림창고앤트러사이트, 카페발로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카페들이 '공장'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하나의 느낌으로만 소비되지 않는 건 모두 다른 공장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대림창고는 정미소에서 카페 겸 작품 갤러리로, 카페발로는 철강 공장에서 카페 겸 가구 스튜디오로, 앤트러사이트 합정점은 신발 공장에서 오로지 카페 용도의 적요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서울에 있는 카페들도 뿜어내는 색깔이 이렇게나 다른데 프라하는 어떨까'하는 호기심에서 우리는 Kavárna 행을 결정했다. 



    공장을 개조한 카페. 다만 Kavárna의 전부를 담기엔 부족한 수식어다. 아직 서울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목공소가 변형된 카페인 것도 한몫 했지만 Kavarna에게 그 수식이 조금은 빈약하다고 느꼈던 가장 큰 이유는 공장 내부와 함께 터까지도 카페의 일부로 활용한 덕분이다. 


    Kavarna는 공장을 개조한 카페가 아닌 공간을 재생한 카페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Kavarna가 위치한 Prague 5 구역의 Smíchov는 산업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원래 이 지역을 구성하던 정원과 여름 별장은 점차 공장으로 대체돼며 "A one hundred chimneys Manchester"라는 명성을 안겼다. 곧 이 지역에 시청이 들어섰고, 무료로 무선 인터넷을 제공한 최초의 지구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가 Kavarna를 방문하기 위해 내렸던 지하철역 Anděl 근처는 마치 을지로나 역삼, 판교처럼 수천개의 사무실과 큰 쇼핑몰로 뒤덮여 있다.


    흔히 공장을 개조했다는 곳을 들리면 출입문 내부로 들어서야만 과거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그랬다. 활용할 수 있는 땅덩어리가 좁거니와 토지 값이 비싼 탓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그랬다. 하지만 kavarna에서는 흔적이 아니라 그 시절을 상상할 수 있다. 그대로 남은 공장의 외벽, 나무로 만들어진 보통 여자 키 남짓의 대문, 공장의 내부로 들어서기 전의 드넓은 터, 그 터 곳곳에 놓인 장작 더미들. 건물 내부에서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구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것보다는 공장 내외부를 들락날락 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상상된다. 사무실과 쇼핑몰로 구성된 Andel역 근처에서 약 300평은 되어 보이는 공간에서 18세기가 보이는 듯하니 더욱 공간을 재생한 것 같다. 





    목공소 출신답게 나무로 만들어진 대문을 열면 땅부터 밟아야 한다. 질퍽이는 땅을 두 발걸음 즈음 밟으면 정면에는 장작 더미가, 오른편에는 낡은 트럭 자리한다. 조금만 더 내부로 들어서면 널찍한 땅 곳곳에 놓인 테이블을 꽉 채운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비 온 뒤 날이 갠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프라하 방문 7일 차. 맑은 하늘 아래에서 물을 먹은 땅을 밟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서울에 비해 크기가 작은 프라하로 9일 간 여행을 와 우리에겐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아기자기한 파스텔 톤의 프라하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색다른 느낌의 공간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맥주를 시키고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음식을 시키고, 누구는 사진을 찍고 누구는 찍은 사진을 보며 그대로 시간을 흘려 보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필터를 씌운 것 같은 색감이 핸드폰 속으로 들어와서 좋았고, 하늘은 따뜻한데 땅은 아직 추워서 적절한 온도가 유지된 것도 좋았다.






    새로운 수식어를 부여하고 싶은 공간, '과거를 재생한 카페' Kavarna에서 나와 프라하성에 이어 전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곳 비셰흐라드로 향했다. 



    07Vysehrad

    질퍽한 땅을 밟고 나와 비셰흐라드에 도착하니 내 발바닥의 피곤을 가중시키고 있는 원인, 돌바닥을 만났다. 크기며 색깔이며 제각각 개성을 지닌 돌을 밟으며 너무 불편한 이 돌바닥이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관광업이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체코에서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는 건 중요하다. 건물 만큼이나 중세의 한복판에 와 있는 느낌을 자아내는 바닥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100% 이해된다. 그런데 편의를 너무나도 헤치는 이 돌바닥에 대한 토론이 전혀 없었는지 알고 싶었다. 




    실제로 돌바닥은 어느 정도 골칫덩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의도와 다르게 활용될 수 있다만 체코의 돌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2000년도, 프라하에서 World Bank/IMF 정삼회담이 열리던 때 수면 위로 드러나던 세계화의 폐해에 시민들은 광장으로 몰렸다. 거대 자본을 이용해 강대국이 약소국의 부를 빠른 속도로 흡수하는데 화가 난 이들의 무기는 바로 돌. 자신들을 막아서는 경찰을 향해 도로에 박힌 돌을 재활용[각주:1]했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의 재활용 덕분에 한국으로 따지자면 광화문 광장과 같은 곳의 돌들은 대부분 도로에서 벗겨졌고, 비포장 도로로 남았다. 


    폭력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돌은 한 순간에 제거됐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동차의 타이어가 여느 다른 나라의 것보다 탄탄해야만 하고, 자전거를 타기엔 엉덩이 근육이 반드시 필요한데다, 도로를 포장할 때 노동자의 한땀 한땀이 들어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프라하는 현대의 편의보다 역사의 유지를 택했다. 




    비셰흐라드에서 돌바닥을 만난 건 당연하다. 프라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요새였다. 프라하 성이 블타바 강을 중심으로 왼편에 위치한 요새라면, 비셰흐라드는 오른 편에 위치하며 프라하를 보호했다. '요새'라는 단어에서 조금은 유추할 수 있듯이 권력의 중심부가 요동칠 때마다 역사의 스토리가 생성된 장소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요새로의 의미가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역사적인 공간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1893년에 만들어진 국가의 공동묘지 덕이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체코의 발자취를 이어온 이들의 무덤이 들어서자 1911년 요새로서의 역할을 확고히 걷어낸 이후에도 역사성을 견고히 유지하고 있다. 



    사실 비셰흐라드가 이렇게나 역사적인 장소인지는 몰랐다. 프라하성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프라하 장관을 볼 수 있는 장소라기에 꽤 멀고, 꽤 높더라도 들리기로 했다.


    우리는 다시는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았고, 특히나 Andel 역에서는 더더욱 타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 C 노선의 Vyšehrad 역으로 향하면 굳이 검색하지 않더라도 쉽게 도착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굳이 이 어려운 검색을 해내며 트램을 타고 비셰흐라드에 도착했다. 



    프라하 핫플레이스 추천 책의 소개는 정확히 맞아들었다. 오히려 프라하 성에서 보던 전경보다 감흥이 일었달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프라하 전경을 구경하고, 걷고, 숲속에서 캠핑하는 무리를 보며 다음에는 우리도 캠핑을 하자고 약속한 뒤, 비셰흐라드를 벗어났다. 


    프라하와 작별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7일차. 바위 위에 세워진 요새에서 프라하의 빨간 지붕을 한 눈에 담으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1. Source: https://www.tasteofprague.com/pragueblog/how-are-the-streets-in-prague-pave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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