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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춘 Non-Stop Talk About 자원봉사자 김성현
    Article/Interview 2017. 4. 7. 15:50

    스펙 5종 세트의 하나가 된 '봉사'. 그는 스펙에서 봉사만은 빼달라고 말한다. 봉사에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세상에 외친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주장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주변의 눈에 비친 그의 봉사는 '쇼'에 불과했다. 평범한 대학생들에겐 봉사활동이 스펙을 위한 도구 즉,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용기내어 다시 외친다. 봉사활동은 그렇게 평가되어선 안된다고. 그러니 힘을 내어 진심이 담긴 봉사를 함께 하자고.

     

     "사회의 빛나는 곳이 아닌, 우리 마음의 빛을 보세요"

     Talk About 자원봉사자 김성현씨


    현실 속 봉사활동은 ‘남을 위한’이 아닌 ‘나를 위한’것으로 자리매김 한지 오래다. 하지만 봉사활동이라 함은 으레 ‘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봉사’와 ‘경력’이 합쳐지고 있는 현실에 당당히 반기를 드는 이가 있다. 봉사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이라고 외롭게 외치고 있는 김성현씨(사회복지학과 3)다.



    1%의 기적, 새로운 삶을 탄생시키다
      그의 어린 시절엔 돌잔치가 없다. 태어난 지 20일이 지나 백내장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완치율 1%라는 작은 희망을 안고, 미국으로 떠났다. 먼 미국 땅을 오가며 대수술을 2번이나 치러냈다. 그는 백내장 완치 판정을 받아 1%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기적과도 같았던 그 날들을 ‘도움으로 이루어 낸 시간’이라고 했다. 의사 아저씨, 많은 이웃들, 그리고 부모님의 도움.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주변 사람들의 도움에 보답하며 살라고 하셨다. 그래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 하셨다. 
     

      하지만 그는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이웃의 어려움보다는 자신의 불행이 더 크게 다가왔다. 백내장 완치 판정에도 그는 5살 때부터 돋보기안경을 써야 했다. 돋보기안경 덕에 그는 하루하루를 친구들의 놀림 속에서 보냈다. 안경을 빼앗아 가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그의 안경을 장난감으로 삼기 일쑤였다. 그는 점점 소심한 아이로 변해갔다. 


      하지만 김성현씨의 부모님은 ‘당당함’을 원했다. ‘너의 눈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그는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담임선생님과 상담했다. 그리고 학급임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눈을 놀림감이 아닌, 안타까움의 눈길로 봐주었던 친구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침내 김성현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급 반장이 됐다. 


      초등학생 최고의 명예직인 전교회장까지 거친 김성현씨는 이후 적극적인 사내아이로 변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그려놓은 우울한 세상에서 벗어나 주변에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이들이 떠올랐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보였다.



    나 홀로 봉사활동, 그의 외로운 투쟁
      ‘이제 좀 봉사활동 하겠구나’싶어 이 곳 저 곳을 다녀봤지만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는 어머니와 함께 풍납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했다.


      14살, 봉사활동과 처음 조우한 순간이다. 그에게 처음 주어진 임무는 결식아동·독거노인 가정에 반찬을 배달하는 일이었다. 일주일에 이틀, 40여 가정을 돌았다. 하루는 김치를, 하루는 쌀을 배달하고 오늘은 아무개 할아버지와 세상살이 여담을, 오늘은 귀여운 아이의 오빠 노릇을 자청했다. 


      자그마한 손으로 쌀과 김치를 날랐다. 14살의 그에게는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봉사활동 첫 날, 그 때 느낀 감정은 그의 평생을 봉사활동으로 안내했다. 한 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살고 계시는 노부부를 본 순간 그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백내장으로 보내온 세월에 ‘나만큼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어린 시절. 안정된 환경에서도 주위를 돌아볼 수 없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있구나’하는 자각은 부끄러움을 책임감으로 돌려놓았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봉사활동과 친구삼아 보냈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일명 ‘봉사활동에 미친놈’으로 통했다. 그들의 부모까지 그의 봉사활동을 ‘대학가기 위한 쇼’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김성현씨는 체험을 통한 공부를 원했다. 책상에만 앉아 있는 앉은뱅이보단 두 발로 직접 뛰는 지식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봉사활동을 통해 더 큰 세상에서 더 넓은 지식을 얻었다.



    사회의 차가움을 품에 안은 사나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던 슬럼프. 그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가 어린이 화상환자 후원회에서 일할 때였다. 화상은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미용성형으로 분류돼 있었다. 수술비 지원이 안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린이들이 안타까웠다. 그때, 그는 거리로 나섰다. 


      그는 거리에서 의료보험 확대를 위한 법 개정 서명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차가운 표정만을 남기고 떠났다. ‘학생, 공부나 해’, ‘어우 징그러워’, ‘돈 받고 하는 거예요?’등 배려 없는 말들에 그의 열정도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봉사활동 현장을 찾지 않았다. 6개월 동안 그를 욕하던 친구들 마냥 책상에 앉아 공부만 했다. 수업을 듣고,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집으로 갔다. 기관과도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후 4시가 될 때마다 매주 설렘으로 봉사활동 현장에 나갔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 시각, 그의 머릿속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30분 후, 항상 방문하던 집에 반찬을 전해주는 상상, 5시쯤 그를 친오빠처럼 따르는 아이와 얘기하는 상상.


    “이 때, 깨달았어요. 그들로 인해 내가 살았더라고요. 내가 누구를 도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도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어요.” 


      이후로 그는 사회복지 전문기자를 꿈꿨다.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냉랭하게 얼어버린 독자들의 마음을 녹이고자 하는 목적, 그리고 소외받는 이들의 어려움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까지. 그는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어려운 이웃뿐만 아니라 굳어버린 마음을 지닌 이웃까지 끌어안고자 했다.



    내 마음 바라보기 
    “봉사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나요? 그렇다면 봉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진심이 담긴 봉사활동을 했다면 뿌듯함보다는 아픔을 먼저 느껴야 한다고 김성현씨는 말한다. 봉사활동을 하는 순간, 자신의 아픔만을 느끼는 그들을 김성현씨는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의 힘든 것에 치우쳐 자신의 도움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르는 자원봉사자들. 그는 무미건조하게 봉사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이웃의 어려움에 마음이 동요하길 바란다.


      상당수의 20대가 봉사활동을 닫힌 마음으로 하듯이 닫힌 사고로 청춘을 보내고 있다. 이 시기를 그저 미래를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그는 전한다. 미래의 삶으로만 내 인생을 평가하지 말라고. 어른들이 항상 말하지 않는가. ‘그 시절이 좋았지’, ‘돌아가고 싶어’라고. 훗날 돌아봤을 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자산은 지금 이 시기가 아닐까 싶다는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사회의 빛나는 곳이 아닌, 우리 마음의 빛을 보세요”

    글 송은지 기자 ilnrv@cauon.net
    사진제공 김성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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