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6 이기심과 이타심의 공생관계 (2) /미세한 변화와 거대한 결과 급식비 미납 명단이 불리던 그날도 진희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조회 시간 말미에 잠깐 따라 나오라는 선생님의 말을 제외하고는 평소의 풍경과 같았다. 더 이상 비참한 감정에 내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진희는 평소와 다른 선생님의 관심에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선생님을 따라 나설 뿐이었다. “김진희, 여기 근처 성민교회에 다니냐?” “아뇨” “그래? 뭐 어쨌든 거기 목사님이 너 급식비 내줬다. 앞으로 계속 내주신다니까 고맙게 생각하고 오늘부터 밥 먹어라. “ “네? 네.” 모르는 교회였고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굳이 힘을 들여 누군지 알고 싶지도,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감사함을 느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교.. 2018. 11. 18. 이기심과 이타심의 공생관계 /소심한 비밀 살만해진 진희가 말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에 사는 가난한 아이한테 후원해볼까 싶다고. 채원은 급작스레 튀어나온 대화 주제에 마시던 술잔을 내려 놓았다.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은 표정으로 진희를 응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채원의 반응에 멋쩍은 웃음을 지은 진희는 자신감을 잃은 투로 중얼댔다. "아니 뭐, 원래부터 생각은 있었어.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때야 뒤로 제쳐둔 것 뿐이고... 이제는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데..." 채원은 그래, 네 마음이지 뭐, 왜 이렇게 눈치를 봐, 라고 말하곤 한동안 잔에 머물러 지루했을 술을 비웠다. 말은 퉁명스레 했지만 진희의 속마음을 들은 채원은 놀랐다. 번 돈은 모두 저축한다는 철칙과 지출은 적을수록 좋다는 신념을 만날 때마다 몸소 보.. 2018. 11. 18. 파전에 청하 - 추억을 안주 삼는 혼술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 집 근처의 파전이 떠올랐다. 더위가 가신 자리를 쌀쌀한 공기가 채운 요즘 날씨. 급격한 온도차를 감쌀 파전의 연기가 고팠나 보다. ‘파전하면 막걸리’. 거스를 수 없는 공식이라는데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최근에 새로 발견한 조합도 의외로 괜찮다. ‘파전에 청하’다. 기름을 먹은 파전의 느끼함을 청하의 깔끔함이 쓸어내리는 기깔난 조화에 빠졌다. 포장마차에 들러 해물파전 한 장을 포장하고, 편의점에 들려 청하 한 병도 봉지에 담았다. 집에 도착해 파전을 베어 물고 연이어 청하를 들이키니 불현듯 청하와 관련된 추억이 떠올랐다. 나의 친구 A모 씨는 청하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청하의 뚜껑을 좋아한다.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다 마신 청하의 뚜껑을 모아 한 줄로 걸어놓는 걸 좋아한다... 2018. 9. 26. 가늠할 수 없는: 술 한 잔에 개워내지지 않는 인생의 하중 술에 취해 지그재그로 걷는 와중에도 저 멀리서 걸어오는 남자의 형체가 또렷이 들어왔다. 아버지였다. 가슴 안쪽에서 심장이 크게 낙하하는 느낌이 들면서 잃어가던 정신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똑바로 걸어야만 했다. 온몸을 감싼 알코올 향도 사그라들어야만 했다. 긴 다리를 이용해 휙휙 걸어오는 그의 속도는 빨랐다. 어떤 조치를 취할 겨를이 없었다. 금세 내 앞에 도달한 아버지는 당신 앞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나를 살며시 안았다. 걱정이 내포된 손길과는 다르게 표정은 붉으락푸르락했다. 어느 누구에서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했구나. 미약하게나마 깨달으려던 때였다. "유채원, 니 술 마셨나?" 난생처음 보는 얼굴에 기가 죽어가던 .. 2018. 9. 24. 2017년과 2018년의 건널목을 성북동 한옥에서 자주는 아니지만 대략 두달에 한번씩은 가는 곳, 책바(Chagbar)에서 『20킬로그램의 삶』이라는 책을 접했다. 여기서 작가의 이른바 몰상식한, 아니 오랜 친구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장거리 여행을 떠나버린 당일 헛헛한 마음에 작가를 불러낸다. "야, 27일에 월차 내고 나랑 놀자!" 남자친구가 생긴 이후 연락두절 상태와 다름 없었던 그녀의 친구가 남긴 메시지를 작가는 괘씸히 여긴다. 본인 옆을 지키던 남자친구가 사라진 후 곧바로 본인을 찾자 괘씸죄를 적용해볼까 했으나 작가는 다시 친구의 부름에 응하기로 마음 먹는다. 친구의 급작스런 제안에 그들은 하루짜리 서울 여행을 떠난다. 그들의 선택은 북촌의 한옥. 31페이지에서 38페이지까지를 읽고 책을 덮은 후, 나 역시 곧바로 보람이를 소환했다. "야, 우리 .. 2018. 5. 7. 오로라 현수는 똑똑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헤밍웨이의 책을 숙독했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로마인 이야기' 전집을 독파했다. 이런 아이가 있을 수가. 그의 부모는 이렇게 생각했단다.현수의 아버지는 선비였다. 가난했으나 학식이 뛰어났다. 현수의 할머니는 아버지가 뛰어난 학식을 이용해 계층상승을 이루길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시골교회의 목사를 택했다. 가난은 이어졌다. 시골 목사에게 사치였으나 아버지는 서재를 원했다. 제대로 된 살림 밑천은 없어도, 네 식구가 한 칸짜리 방에서 살 붙이며 살아도 책 욕심은 내려놓지 못한 아버지였다. '책 살 돈으로 냄비나 사지'라거나 '이 책들 좀 치워!'라는 엄마의 성화에 아버지는 서재가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입 한번 벙긋 하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는 동네 폐가를 직접 개조.. 2017. 4. 7. 이전 1 다음